1. 시리아의 복잡성: 역사적, 민족적 맥락
시리아는 복잡한 국가이며, 이는 레바논과 같은 주변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리아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섞여 있는 국가로, 1946년에 건국된 이후 첫 10년 동안 9번의 군사 혁명을 겪었다. 이후 알라위트 소수 민족이 다수 민족을 장악하면서 50년 이상의 안정기를 맞이했다. 시리아 인구의 약 70%가 수니파 아랍인이지만, 이들 역시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알라위트족은 혁명 이전에는 약 12%를 차지했으며, 그 외에도 기독교인, 쿠르드족, 드루즈족 등 소수 민족들이 존재한다. 각 공동체는 국가의 일부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바트당 이념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는데, 이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보고, 알라위트 소수 민족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에서는 여전히 부족, 민족적 차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동체의 복잡성이 더해진다. 레바논에서도 마찬가지로 각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으며, 소수 공동체는 외부의 동맹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거나 내부의 동맹을 통해 보호를 받으려 한다. 이러한 동맹은 일시적이며, 적대감이 언제든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시리아나 레바논과 같이 작은 소수 민족은 동맹과 보호를 필요로 하며, 때로는 외부 세력에 의해 이용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학 관계는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군사적 요소가 국가 자체보다 더 강력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내부의 적대감뿐만 아니라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하며,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2. 권력 공백과 외세의 개입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고 몰아낸 후, 시리아에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당시 헤자즈(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아미르 압둘라는 약 2,000~2,5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에 맞서려 했으나, 형의 죽음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분노가 컸지만, 영국은 그에게 “시리아를 내버려 두면 트란스요르단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미르가 다마스쿠스에서 철수했을 때, 그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하이파로 왔다. 이 지역의 역사는 매혹적이며, 전 세계적인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에는 ‘아랍 반란’이라고도 불리는 드루즈족의 반란이 술탄 바샬 아트라쉬의 지도하에 일어났다. 이 반란은 프랑스군을 시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치적 공백이 생겨났고, 진정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40년대 초에 발생한 9번의 쿠데타는 강력한 지원 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바트당 정권은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국가 형성의 어려움과 정체성의 문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들은 다양한 시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모자이크와 같아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요르단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지만, 암만 시내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출신의 이발사 후세인의 이야기에서 보듯, 정체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후세인은 자신의 아들이 요르단에서 태어나고 아내가 시리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람라 출신이라고 말했다. 이는 세대를 거쳐 전해지는 정체성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르단 사회의 75% 이상이 자신을 요르단인으로 여기지 않고, 팔레스타인인으로 여기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유산은 긴장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압둘라 2세 국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국가 해법’을 강조하며,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되지 않으면 중동에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요르단-팔레스타인 혈통의 왕비와 결혼하여 모범을 보이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이 새로운 정체성의 창조인지, 아니면 정체성의 혼합인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유럽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민자 사회는 자신을 유럽인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사회적 긴장을 야기한다. 스웨덴 총리는 최근 스웨덴 국가가 폭력에 대한 독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동서양의 융합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구 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서구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정체성에 대한 탐구가 부족했다.
4. 시리아 파일: 복잡성과 미국 정책
시리아는 터키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와 관련하여 매우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은 시리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유엔에서 G1에서 G3로 강등했다. 미국은 무하마드 알 졸라니(아메드 샤) 정권에 대해 명확한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알카에다에 가입하여 미국과 서방 세력에 맞서 싸웠으며,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와 함께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레반트를 정복하려는 조직인 자바투스라를 이끌고 있다. 그의 단기 목표는 시리아 전역에 대한 권력을 통합하는 것이지만, 터키와 카타르의 지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미국의 제재 해제를 필요로 하지만, 미국은 이를 꺼리고 있다. 아메드 아샤라는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지역에서 태어나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지만, 급진화되었다. 그는 알카에다와 자바트 알 누스라에서 활동하며, 세계에서 가장 지명 수배된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 되었다. 미국은 정책 추진에 신중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운 시리아 프로젝트에서 아메드 샤라가 세계에 던지는 딜레마는 자신의 혈통과는 다른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는 지하디스트처럼 행동하지 않고, 아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다른 종교인들과 교류하며, 소수 민족과 여성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실용적인 접근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시리아를 믿는다면, 권력 공유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시리아의 복잡성과 종파 간의 분열을 고려할 때, 수니파 다수라고 해서 새로운 다수 통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메드 샤라가 이끄는 샴 연합은 27~31개의 다양한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항상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살라피즘과 지하디즘이지만, 그 안에서도 많은 분열이 존재한다. 일부 세력은 아메드 샤라의 의제를 거부하고, 세속주의를 추구하며, 심지어 다른 이슬람 세력과도 싸울 의향이 있다. 다마스쿠스에 진입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아메드 샤라의 군대였지만, 그보다 먼저 예르마에서 온 작은 부대가 있었다. 아메드 샤라와 만난 후, 그는 “나는 그를 따르지 않고,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상황은 여전히 유동적이며, 시리아 전쟁의 정점에서 수많은 준독립적인 무장 단체가 존재했다. 아메드 샤라가 단일 군대를 원한다면, 정체성 정보 구축을 통해 권력 공유 공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비현실적이며, 터키의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터키는 HTS와 자셸 와탄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들은 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중개인이 되기 위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친오스만 안정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는 복잡한 문제이며, 앞으로 더 논의해야 할 것이다.